남이나 북이나 그어디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니련가
동이나 서이나 그 어디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자매들 아니련가
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산천 내 나라 내 사랑아 |
南であれ 北であれ
いずこに住もうと
皆同じ愛する兄弟ではないか
東や西
いずこに住もうと
皆同じ懐かしい姉妹ではないか
山も高く 水も清い
美しい高麗山河
わが国わが愛よ |
전월선(田月仙)과 「고려산천 내 사랑」 (高麗山河わが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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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월선(田月仙)은 동경에서 태어난 재일 교포2세. 양친은 한국 출신. 조선학교를_졸업 후, 일본의 음악대학에 진학하여 성악을 공부. 21세네 음악의 세계에 데뷰. 二期會 회원으로서 자주 오페라의 주역을 맡았으며 「수선화가 핀 듯한 스타성」이라는 화제를 낳으며, 그 평판은 해외까지 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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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4월._전월선은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평앵에서 개최된 세계음악제에 초대되어 처음으로 조선반도에서 가성을 발휘했다. 그리고 당시의 김일성주석의 앞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조선반도 전체를 하나의 나라로 보는 그녀에게는 북과남은 같은 조국이였다. |
1994년 10월. 서울 제도600년을 기념하는 한국오페라단과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카르멘」의 주역으로 전월선은 한국에서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린 것은 매스컴의 취재였다.」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그녀가 조선적네서 한국적으로 국적을 변경한 일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신문은 「김일성의 앞에서 노래 부른 프리마돈나」라고 크게 실렸다. 모든 매디아는 국적변경에 관심이 집중함에 따라, 가수로서 조국을 방문한 그녀에게는 심기 불편한 일이 되었다. 재일코리안에 있어서 조선적은 조선적이 아니라는 것도 한국의 매스컴은 잘 몰랐다. 아시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에술의 전당 서울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카르멘 공연은 대성공적이였다. 한국의 매스컴은「가창력뿐만 아니라 한국의 가수에게는 볼수 없는 무용과 연기를 펼쳤다. 」라고 했으나 전월선은 분단국가의 아픔을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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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귀국 후, 일본의 메스컴은 전월을「처음으로 38도선의 양측의 무대를 밟은 가수」라는 기사로 크게 다루었다. 그때 전월선은 남북공연을 기념하는 리사이틀의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떻게든 한 곡을 처음으로 부르기로 하였다.「고려산천 내 사랑」이였다.
전월선이 카르멘의 연습으로 밤 새우고 있던 매일, 동행한 디렉터는 작은 민속주점에서 흘러 나온 몇 곡의 노래를 녹음했다. 그 중의 한 곡이「고려산천 내 사랑」이였다. 귀국 후,전월선은 이 곡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전월선은 소프라노의 음계에 맞추어「고려산천 내 사랑」의 악보를 만들었다.
1995년5월의 「전월선 오페라 리사이틀」에서 처음으로 「고려산천 내 사랑」를 뷸렀다. 처음으로 38도선의 양측에서 노래 부른 가수의 공연을 보려고 1300석의 회장은 만원이 되었다. 더욱 놀란 것은 재일코리안의 모임이였다. 시인,영화감독, 소설가, 연출가, 학자, 인권운동가 둥 북과 남의 구별이 없이 재일코리안이 이런 장소에서 모인 것은 보기 드문 일이였다. 시인인 김시종씨는「재일로서 살아가는 일은 마이나스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삶으로, 국제 무대에 서는 것은 가능성의 상징」이라고 평했다. 그 후, 그녀는 많은 리사이틀과 콘써트에서 반드시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를 처음으로 들은 많은 재일 코리안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일본과한국의 누구도 이 곡의 작가를 몰랐다. |
1996년1월. 워싱턴에서 우편물이 왔다. 악보와 편지였으며,「고려산천 내 사랑」의 작가였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전월선의 존재을 LA의 지휘자한테 듣고 감격했다고 한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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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5월. 전월선은LA의 오케스트의 콘서트에 출연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오케스트의 지휘자인 재미코리안 레이몬드 조는「고려산천 내 사랑」의 작가를 알고 있었다. 레이몬드 조는 전월선의 존재를 작가에게 알렸고, 작가는 전월선에게 편지를 보냈다. 10년 전,레이몬드 조에게 「고려산천 내 사랑」의 악보를 가져 온 사람은 작가의 의형제인 이승운씨였다. 당시 반공이 철저했던 미국에서는「고려」라는 단어를 북의 색으로 여길 정도였다. 이승운씨와레이몬드 조는가수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찾게 된 사람은 브로드웨이에서 율부리너와 함께「왕과 나」에 주연을 한 이재우씨였다. 그는 악보를 받고 피아노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눈물이 나와서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 정말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은밀히 이런 가사를 써서 작곡했다. 진정 우리 나라는 이런 사람이 있으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통일이 되리라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리고「고려산천 내 사랑」이 태어난 미국에서 수십년만에 불리워졌다. 어두운 객석에는 많은 재미코리안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콘써트가 끝나고 전월선은 워싱턴에 사는「고려산천 내 사랑」의 작가를 방문했다. 그것은 가사를 통하여, 조선반도에서 보면 동쪽 끝의 일본에서, 서쪽의 끝인 미국을 방문한 것이다. |
작가인 노광욱(盧光郁)씨의 역사는 남북의 분단의 역사 그대로였다. 그는 현재의 북조선의 남포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음악가로서 활동을 하다가, 남북의 싸움에 실망을 해, 조선전쟁 휴전의 해에 미국으로 건너 왔다. 당시의 한국에서는 우와 좌의 대립이 심해서 중도파를 고집하던 그는 양쪽에서 박해를 받았다. 그후 미국 국적을 얻어 치과의사가 된 노광욱씨의 몸은 미국에 옮겼으나, 머리속에는 조선반도로 가득한 채 반년이 흘렀다. 박정희 시대에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지안, 북에서 받는 훈장까지 거부하고, 같은 민족이 이데올르기로 대립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생각으로「고려산천 내 사랑」을 작사 작곡. 1990년 발표를 위하여 한국을 방문 했으나, 친북파로 보이는 노래가 유행되지 않았다.「음악가로서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이 곡은 매우 소박하고 순수하며, 특별한 지식인이나 정치가가 아닌, 일반의 북과 남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시라고 할 정도는 안되고, 소박한 기분을 쓴 것 뿐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월선은 자신이 여러 장소에서 노래를 불러 온 비디오를 노광욱씨에게 보였다. 노광욱씨는「정말로 달에서 선녀가 내려 온 듯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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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전월선은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KBS 한국방송공사의 연말 프로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전월선이 2년 전에 처음으로 한국에 가서 한국 TV에 소개되어, TV 앞을 떠나지 못했던 시청자들 그리고 실향민들에서 큰 반응을 일으켰으며, KBS TV의 「열린 음악회」에서「고려산천 내 사랑」을 불렀다. 이 스튜디오에는 2만명의 관객이 있었으며, 전파를 타고 전국의 수천만명이 보았다고한다. 긴 세월 동안 잊쳐진 노래를 마침내 한국 청중의 앞에서 부르게 된것이다. 재일교포, 재미교포, 그리고 500만명이되는 재외교포의 신정을 본국의 사람들에게 호소하게 된 것이다. |
1997년에는 서울, 광주의 연속 리사이틀에는 관객들도 함께 「고려산천 내 사랑」을 합창으로 불렀습니다. 그후 서울, 창원, 청주, 대구, 의정부, 진주에서의 리사이틀에도「고려산천 내 사랑」을 불렀습니다.
2004년, 전월선의 20주년 리사이틀에는 작자·노광욱이 일본 방문했다.
21세기가 되어도 전월선은「고려산천 내 사랑」을 계속해서 부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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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년 전월선은 유럽 공연 틈틈이 야나체크 필과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고려 산천 내 사랑'의 일본어 버전 '산하를 넘어」를 작사 한 새 노래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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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의 의향에 의해, 「고려산천 내 사랑」은 모든 저작권 관리를 전월선 사무소가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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