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30주년 맞아 訪韓, 在日 한국인 성악가 전월선] 한국이름에 조선학교 다녔지만 당시 춤추는 소프라노 드물어 재일 한국인 소프라노 전월선(55)은 이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손꼽히는 오페라 가수가 됐지만 국적은 엄연한 한국. 어릴 때 생이별한 오빠 넷은 북한 강제수용소에 있다가 숨을 거뒀다. 1985년 평양 김일성 주석 앞에서 공연, 1994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오페라 '카르멘' 주연 등 남·북한에서 공연한 첫 번째 재일교포 음악인으로도 유명하다. 올해 성악 데뷔 30주년을 맞아 한국에 온 그녀는 "가수 생활 30년이 내겐 새로운 시작이다. 국경과 해협을 넘어 계속 노래하는 게 나의 길"이라고 말했다. 전월선은“체제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지만 공연장에서 박수 쳐주는 사람들의 마음은 똑같다고 느낀다. 그래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대에 오른다”고 말했다. 아래 사진은 오페라‘카르멘’에서 카르멘으로 공연 중인 전월선씨. /주완중 기자·전월선씨 제공 운명이 가혹할수록 그녀는 질겨졌다. 도호대(桐朋大) 음대를 졸업하고 오페라에 뛰어들었다. 일본인 오페라 가수들이 노래에만 신경 쓸 때 그녀는 플라멩코 등 갖가지 춤을 연마했다. 1983년 일본 대표 오페라단인 니키카이(二期會)에 입단, '나비부인' 등 큰 무대의 주역을 잇달아 맡으면서 프리마돈나로 떠올랐다. "꿈이 있었어요. 오페라 가수로 성공해 조국의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것." 조국은 한반도 전체였다. 1985년 '전월선 동무 앞'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았다. 북한 평양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노래해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어요. 오빠들 생각에 사무쳐 어떻게든 가야만 한다고 되뇌었죠." 1960년 그녀가 두 살 때 오빠 넷은 한꺼번에 북한에 갔다. 당시 김일성은 재일교포가 '귀국'하면 집과 학교, 직장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재일교포 9만여 명이 북한행 배를 탔다. 현실은 끔찍했다. 4형제가 한날한시에 체포돼 1969년부터 9년간 요덕수용소에 감금됐고, 둘째 오빠는 거기서 죽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1985년 4월 그녀는 김일성 앞에서 북한 요청에 따라 혁명 가극 '피바다'를 불렀고, 25년 만에 오빠들을 만났다. 큰오빠와 셋째 오빠는 수용소에서 얻은 병으로 1990년·2001년 차례로 죽었다. 막내 오빠 소식도 끊겼다. 양복도 네 벌, 구두도 네 켤레 사면서 아들들 만날 날만 고대했던 어머니는 그 후 어렵게 북한에 들어가 아들들 묘를 손수 세웠다.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인들 앞에서 '고려산천 내 사랑'(노광욱 작사·작곡)을 불렀다. 남과 북의 평화를 호소하는 노래였다. 하지만 2004년 9월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공식 시인하면서 마음이 요동쳤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그 노래를 부를 수 있겠어요." 휘청거리던 그녀를 잡아준 건 이듬해 세상을 뜬 어머니가 죽기 전 남긴 녹음테이프였다. 남과 북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란 당부를 담고 있었다. 다시 노래해야 할 이유였다. 2006년 가족의 이야기를 쓴 책 '해협의 아리아'를 출간, 제13회 쇼가쿠칸(小學館) 논픽션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2010년 시작한 동명의 공연 '해협의 아리아'도 매해 이어갈 계획이다. "같은 민족끼리 대립하는 거 정말 안타까워요. 노래로 그 틈을 메우고 상처를 달래주고 싶어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
Chon Wolson officilal Website www.wols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