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잇는 歌姬’ 재일동포 성악가 전월선
자서전 ‘해협의 아리아’ 를 펴낸 재일동포 2세 성악가 전월선씨. <도쿄/박용채 특파원>
그에게 조국은 남도 북도 아닌 한반도다. 스스로도 민단계나 총련계의 편가르기가 싫어 ‘재일 코리안’이라는 용어를 쓴다. 노래를 할 때는 정치적 배경이나 개인적 삶은 철저히 봉인한다. 이런 마음은 가곡 ‘고려산천 내나라’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남이나 북이나 그 어디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니련가. 동이나 서나 어디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자매들 아니련가….” 전월선(田月仙·49)씨. 재일동포 2세 성악가. 남과 북을 오가며 노래해 ‘해협을 넘나드는 가희(歌姬)’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는 붉은색을 좋아한다고 했다. 단순히 정열을 상징해서가 아니다. 핍박, 풍파를 넘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는 마음다짐 같은 것이었다.

‘노래하는 것은 프로지만 글 쓰는 것은 아마추어’라는 그가 지나온 삶을 반추한 자서전 ‘해협의 아리아’를 냈다. 책은 지난해 말 일본 유명출판사인 쇼카쿠칸 논픽션 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삶을 되돌아보기에는 이른 나이지만 꼭 쓰고 싶었어요. 가슴에 묻어뒀던 얘기가 너무나 많았거든요.”

전씨의 출생지는 도쿄(東京)도 다치가와(立川)시. 총련계 초·중·고교, 도호(桐明)학원 음대를 거쳐 1983년 일본의 대표적 오페라단인 니키카이에 입단, 성악가로 데뷔했다. 이후 오페라 ‘나비부인’ ‘피가로의 결혼’ 등의 프리마 돈나로 자랐고, 일본을 비롯해 미국, 유럽은 물론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공연을 개최했다. 외견상 거칠 것 없어 보이는 삶이지만 가슴 속에는 시린 기억으도 가득하다.

경남 진주에서 학도병으로 끌려온 아버지, 동향 출신의 어머니. 리어카 1대로 폐품을 수집하며 살았던 부모들의 삶.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녔던 재일동포 소녀시절, 노래를 하고 싶어 음대를 지원했지만 조선인이라며 문전박대당했던 설움, 조국인 한반도와 삶의 터전인 일본사회 속에서의 갈등…. 어느것 하나 가슴 저미지 않는 대목이 없다.

책에는 단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던 오빠 4명의 북송 얘기도 들어있다. 민족학교 일을 하던 아버지는 당시 한국계 학교가 없어 자연스럽게 총련계 일을 맡았고, 조국 건설이란 이름으로 자식(전씨의 오빠) 4명을 북송사업에 동참시켰다. 전씨가 두살배기였던 1960년이었다.

전씨가 북송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교때였다고 했다. 85년 평양을 방문, 당시 김일성 주석 앞에서 첫 공연을 펼친 뒤 오빠들과의 면회가 이뤄졌다. 그러나 절망스러웠다. 오빠들은 북한에서 간첩혐의로 수감돼 9년간을 강제수용소에서 지냈다. 둘째 오빠는 이 과정에서 사망했고, 남은 3명 중 2명도 차례로 죽었다.

어머니는 오빠들의 비참한 죽음을 듣고 일본에서 북한 인권을 고발하는 투사로 바뀌었고, 2005년 병으로 쓰러졌다. 북한에 한(恨)을 가질 법도 하지만 대답은 예상밖이었다.

“우리 가족들은 물론 동포들의 삶은 정치에 희롱됐습니다. 분단이 그렇게 만든 것이죠. 물론 일본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요.” 그는 이 때문에 이번 자서전이 북한 때리기로 이용되는 것은 사양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방문뒤 94년에는 서울에서 카르멘을 공연, 남북에서 동시 공연한 첫 성악가가 됐고 이후 한국에서도 자주 공연을 가졌다.

다만 개인적 아쉬움은 있다. 북한은 이동과 언론의 자유가 없는 게, 한국은 정권이 바뀌면 대북 정책 방향이 바뀌는 현상이 못내 답답하다고 했다. 재일동포의 아픔도 얘기했다. “재일동포는 일본, 한반도 어느쪽에서 봐도 이방인입니다. 부모 세대에 비하면 고생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항상 모순 속에서 살아갑니다.” 색안경을 쓰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버겁다는 뜻이다.

“새해 희망이요? 핵문제가 해결되고 평화가 온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없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노래를 통해 남북을 한마음으로 잇는 일에 더욱 전념하는 것이고요.”

〈도쿄|박용채특파원〉

Chon Wolson officilal Website www.wols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