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교 놓는 연예인 활동상
메신저로 뛰는 재일교포 스타들

오영환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한·일 양국은 지난 반세기동안 문화교류의 벽을 쌓고 살았다. 하지만 일본문화는 알게 모르게 우리 안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국 문화 또한 일본에 상륙한지 오래다. 그것은 그동안 두 나라를 오가며 문화사절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일부 문화인들의 적극적인 활동 탓이다. 재일교포 스타들을 중심으로 한·일간 문화가교를 놓는 연예인들의 활동을 취재했다.

원코리아(One Korea)동아리-. 민단·조총련 가릴 것 없이 하나가 되자는 뜻에서 출범한 ‘원코리아 페스티벌’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어온 재일동포 문화인들. 한국의 대중문화 개방조치로 가장 주목받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들이다. ‘재일’이라는 원초적 한계로 그중에는 무대가 좁았던 보석들이 즐비하다.

영상·공연·무대를 통해 한국 문화의 정수를, 때로는 편린을 동포와 일본 사회에 심어온 이들은 싫든 좋든 한·일 문화교류의 가교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대중문화의 부분 개방에 따른 ‘재일’의 또다른 숙명이다.

한·일 문화교류의 접점에서 이들은 일본 문화의 메신저역과 일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의 완충역을 동시에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개인적으로는 새 지평이 열리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의 파이어니어 팝그룹이나 일본내 한국 대중문화 전문가들도 한·일 문화교류와 관련, 빼놓을 수 없다.
문화 개방의 파장이 가장 클 분야는 대중가요. 이번에 공연이나 음반 판매는 풀리지 않았지만 상당수의 가수·보컬그룹들이 양국 무대에서 일본어로 한국 노래를, 한국어로 일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재일동포 오페라 가수 전월선(田月仙)은 그 가운데서도 첫손꼽힌다. 그는 지난 10월25일 서울시와 도쿄도(東京都)의 자매결연 1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열린 기념무대에 섰다.

그는 무대에서 일본 가곡  고추잠자리 물떼새 와 자신의 대표곡 고려산천 내 사랑  아침이슬 을 열창했다. 도쿄도의 친선대사이기도 한 그는 당시 아오시마 유키오(靑島幸男) 도쿄 도지사의 친서를 고건(高建) 서울시장에게 직접 전달했다. 그는 그뒤 부모의 고향인 진주를 비롯해 청주·창원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다. 그러나 이때 일본 가요  새벽의 노래 는 일본측의 기대와는 달리 공연허가를 받지 못해 한국의 공식무대에 오르는 데 실패했다.  새벽의 노래 는 본래 일본 여가수인 기시 요코(岸洋子)의 가곡조 노래다.

전월선, 교포가수로 金日成 앞에서 첫공연

일본의 음악명문인 도호(桐朋)대 예술과를 나온 전월선은 전천후 오페라 가수로 일본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기록 도 다양하다. 일본 최대 오페라단  이기회 (二期會)에 교포로서는 유일하게 회원으로 합격했다. 또 지난해 10월에는 외국 국적 가수로는 처음으로 일본 문화청 주최 예술제에, 같은해 11월에는  일본 노래소리 50주년  기념공연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본 오페라 발전과 한·일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을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 재일동포 가수로는 처음으로 남북 무대에 동시에 섰다. 85년 평양 세계음악제에 참가해 김일성 주석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한국에서는 94년부터 몇차례 콘서트를 가졌다. 그래서인지 그의 무대에는 음악을 통해 국경의 벽을 허물어보자는 프리마돈나의 메시지가 응축돼 있다. 그는  한·일 양국의  마음과 마음 을 잇는 공연을 앞으로도 계속 갖고 싶다 며  내년 1, 2월쯤 한국어·일본어 노래가 섞여있는 앨범을 낼 것 이라고 말했다.


재일동포 가수 전월선 일본노래 공식무대서 불러

중앙일보  [ 사회 ] 1998. 10. 2. 金

재일동포 오페라 가수 전월선 (田月仙.41) 씨가 한국의 공식 무대에서 일본 가요 1호를 부르게 될 전망이다.

2일 아사히 (朝日) 신문에 따르면 田씨는 서울시와 도쿄 (東京) 도의 자매도시 제휴 10주년을 맞아 25일 서울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일본가요 '새벽의 노래 (夜明けのうた)' 를 부르게 된다.

도쿄도 국제부 교류추진실측은 "이번 행사를 한.일 양국의 새 시대 교류 출발점으로 삼기 위해 당초 11월로 예정됐던 것을 10월로 앞당기게 됐다" 고 말했다.

한국에서 일본 노래는 공연 등에서 재일동포 가수에 의해 우연히 불리기는 했지만 공식 행사에서 불린 적은 없다.

田씨는 일본에서 오페라 소프라노로 활약중으로 지난 94년과 85년 서울과 평양에서 오페라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새벽의 노래' 는 일본 여가수 기시 요코 (岸洋子) 의 가곡조 가요다.

일 가요 한국무대 ‘데뷔’한다

경향신문. [ 해외 ].1998. 10. 3. 土

도쿄(東京)도와 서울시가 자매결연 1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오는 25일 서울에서 개최하는 음악제에서 일본말 가요곡이 처음으로 불릴 예정이라고 아사히(朝日)신문이 2일 보도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일본문화 해금조치가 내려질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재일 한국인 가수 전월선(田月仙)씨가 부를 「새벽의 노래」가 일본가요 해금 1호를 기록할 것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도쿄도는 이를 위해 이미 서울시의 양해를 얻었으며, 그밖에 「하마치도리(물떼새)」 「아카돈보(고추잠자리)」 등의 후보곡 가사내용에 대해서도 서울시가 현재 문제성 여부를 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일본말로 된 가요곡이 「해프닝」 식으로 불린 적은 있으나 공식행사에서 정식 프로그램에 포함돼 불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문화] 일본대중가요의 일본어 공연 무산

한겨레신문  [ 문화생활 ] 1998. 10. 22. 木

?br> 뵉존걱?하시려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릴 예정이던 일본 대중가요의 일본어 공연이 무산됐다.

22일 서울시 등에 따르면 시는 일본 도쿄도와의 우호도시결연 1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오는 25일 오후 1시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리는 ‘지구촌축제’때 재일한국인 가곡가수 전월선씨의 일본 대중가요 공연을 열기로 하고 최근 문화관광부에 공연심의를 신청했다.

그러나 문화관광부는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계획 일정상 이번 공연에서 일본 대중가요를 일본어로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일본 대중가요 공연을 제외할 것”을 지난 19일 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전씨는 이번 공연에서 일본 대중가요인 ‘요야케노우다(새벽의 노래)’를 제외하고 일본동요인‘하마치도리(물떼새)’‘아카돈보(고추잠자리)’ 등 두곡과 우리 가곡‘그리운 금강산’‘고려산천 내사랑’ 등 4곡만을 각각 일본어와 한국어로 부를 예정이다.

한편 전씨는 오는 23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이번 공연 소감 등을 밝히는기자회견을 가질 계획이다. 박근애 기자

[기자가 만난사람] '전천후 오페라가수' 재일교포 전월선씨

 

일본음악계에   유일한 한국인 프리마돈나 전월선(39). 아름다운 목소리,
열정적인 플라멩코 댄스, 뛰어난 연기력 등 3박자를 갖춘 프리마돈나로 일
본내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가고 있는 교포 2세다. 최초로 남과 북을
오가며  공연을  가진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나라잃은 설움과 분단의
아픔을 조국애로 승화시키며 프리마돈나의 꽃망울을 맺었다.

서울에서 있은 서울시.도쿄도 우호결연 10주년 공연행사를 마친 뒤 지난
달 29일 대구에 들러 계명대에서 간단한 초청연주회를 가졌다.   "안녕하십
니까. 많이 기다리셨죠?" 밝은 얼굴로 웃으며 건네는 유창한 한국어  인사
말에서 조국애의 깊이가 느껴진다.

  "일본에서  한국이름을  갖고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려면 일본인보다 더
뛰어난  무엇이  있어야 했습니다. 춤과 연기 등을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게 좋은 밑바탕이 됐습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학교는 소위 조총련계 학
교로 알려진 민족학교다.

  "민족학교는  재일한국인 가운데 부유층이 다닐 수 있는 학교입니다. 일
본정부에서 학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학비가 많이 비쌉니다."   그러나
그녀의 집은 부유하지 않았다. 그녀가 민족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
버지의 민족애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서  '너의 조국은 한국이다'   '너는 한국인이
라는 것을 잊지 말라' 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민족학교에 다니면서
그런  의식을  더 확실히 갖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배우고, 여러가지 연기학습을 한 것이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는 데에 큰 보
탬이 됐어요."

  그러나  그녀는 한때 학업과 음악을 포기해야 할 위기를 겪었다. 예술에
관심이  많은 그녀의 아버지는 쪼들리는 살림에도 그녀에게 피아노 교육을
시키는  등 많은 정성을 쏟았지만 그녀가 고등학교 다닐 때 사업실패로 더
이상 도쿄에서 살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부모와 동생들은 할 수 없이 도쿄를 떠났지만 그녀는 호텔로비에서 피아
노 연주 아르바이트 등 궂은일을 해가며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일본 도호
대학 예술과를 졸업한 그녀는 83년  '니기가이'  오페라단 전속가수로  입
단했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지만, 오케스트라, 무대장치, 연기력 등의
종합예술인 오페라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최대의  오페라단인  '니기가이' 에 한국인 최초로 당당히 오디션을
거쳐 입단했지만, 그 영광도 잠시,  '조센진(朝鮮人)' 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이 닥쳤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조선인이라는 핸디
캡이 더 부각되는 것이 일본이다. 그렇다고 성공을 위해 조국을 등질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실력이 있어야만 극복할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오페라가수가 할
수 없는 나만의 실력이 중요했어요."  그녀는 이후 재즈 댄스, 플라멩코등
온갖 춤을 배우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보디빌딩까지 했다. 그런 노력  끝
에 85년 '피가로의 결혼' '나비부인' '살로메' 등에 연이어 주역으로 캐스
팅되면서 화려한 시기를 맞는다.

  이  때  그녀의 운명을 바꾸는 한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평양에서 열린
세계음악제에  초청받은 것이다. 80여개국이 참가한 이 음악제에서 그녀는
뛰어난  가창력과 화려한 춤솜씨 등 열정적인 무대연기를 펼침으로써 그녀
의 활동무대가 세계로 비상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 해 중국 베이징, 상하이, 난징 공연에 이어, 이듬해에 소련 모스크바
공연  등 해외공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94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비제의
'카르멘'  공연으로 우리들 앞에 성큼 다가왔다. 그 때 이후 그녀는  지금
까지 다섯차례나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가졌다.  서울공연  1년전인 1993년
그녀는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꿨다. 내력이 있을 것 같다.

  "제 국적은 원래 '광복전' 조선입니다. 해외활동을 하는 데 편리해서 국
적을 한국으로 바꾸었습니다."  남과 북의 이분법적 잣대로 자신을 보지말
아 달라는 의미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저는  남과   북 둘다 제  조
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덜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녀는  금강산 관광,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일본문화 개방 등
남.북간과 한.일간 관계변화의 움직임속에 자신이 할 역할을 찾기 위해 노
력중이라고 했다.

  "제가  살아온 삶, 그리고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예술가로서 제가 할 역
할이  무언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구시민들앞에서 꼭 공연할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Chon Wolson officilal Website www.wolson.com